저렇게 연약한데 물 위를 떠다니면서 살아야 하니 얼마나 힘들겠어. 그래서 살아있으려고 잎까지 버려가며 저런 모습이 된 거야….
언젠가 오빠가 어린 나의 손을 잡고 개울에서 해줬던 말이 종종 생각난다. 그때의 오빠는 부평초에게서 오빠의 모습을 봤을까, 아니면 아빠의 모습을 봤을까. 가족이라서 닮아버린 건지 언젠가부터 나도 흐르는 물을 따라 떠다니는 부평초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딘가에 붙어있지 못하고 작은 바람에도 밀려나, 그저 살아있기 위해 하나씩 버려가는 우리의 모습이 부평초와 닮아 있었다.
취객들의 싸움 소리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빚쟁이들에 대한 불안으로 잠 이루지 못했던 어린 날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우리 엄마는 언제 와, 라고 어리광 피우고는 했다. 몇 밤을 자면 엄마가 돌아올 거라는 자신 없는 약속과 엄마는 우리를 버린 거라는 확언이 어지러이 엇갈린다. 애써 웃는 얼굴과 화난 척 하는 옆모습에서 나는 미처 숨기지 못한 그리움을 읽어낸다. 그들과 달리 나는 엄마라는 단어를 입 안에서 몇 번이나 굴려봐도 아무런 울림도 느낄 수 없었다. 이따금씩 백화점을 스쳐지나갈 때 나는 화장품 향기에서, 혹은 청아하게 울리는 여자의 구두 소리에서 어렴풋이 떠오를 듯 말 듯한 기억을 더듬어볼 뿐이다.
미술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을 때 곤혹스러워하던 얼굴을 기억한다. 아빠가 오빠의 등록금을 마련하겠다며 투자한 돈이 하루아침에 사라졌을 때였다. 빌린 적 없는데도 갚아야 할 돈이 하루가 다르게 몸집을 불려가던 때 나는 철없이도 그런 말을 했었다.
질 낮은 스케치북과 물감이 내 이불 위에 올려져있던 날이 있었다. 오빠가 문제집 살 돈으로 사왔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아무것도 그릴 수 없었다. 날 안쓰럽게 여기는 오빠의 마음이 무거워서, 8절 스케치북이 너무 넓게 느껴져서…. 그림 그리고 싶다고 하지 않았다면 오빠가 스케치북 같은 걸 살 일은 없었을 텐데. 나 대학 안 가. 그렇게 말하는 오빠의 뒷모습을 봤을 때, 나는 서글펐던 것 같다. 오빠는 나보다 똑똑하잖아. 그냥 대학 가지. 가고 싶잖아. 누가 누구를 불쌍해하는 거야…. 스탠드를 켜놓고 밤을 새는 오빠의 뒷모습에다 대고 그 말은 결국 하지 못했었다.
남자친구는 살면서 처음으로 내가 좋다고 말해준 사람이었다. 툭 튀어나온 손마디, 약간 굽은 등, 버석버석한, 나와 같은 비누 향이 나는 머리카락…. 그 애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안쓰러웠지만 나는 멋대로 그 감정에 좋아한다는 이름표를 붙인다. 그 애의 말마따나 내가 좋다고 해주는 사람은 그 애밖에 없었으니까. 비슷한 처지끼리 끌리기라도 한 건지, 그 애에게도 갚아야 할 돈이 있었다. 해준 것도 없으면서 빚만 남겨놓고 갔다며 소리 죽여 울던 등, 방을 가득 채우던 술냄새…. 남들 다 이 정도 빚은 갖고 산다는데 왜 그 정도 빚이 우리한테는 이렇게 벅찰까. 항상 살얼음을 걷는 듯한 기분으로 돈을 나눈다. 그러고 나면 딱 한 달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돈이 남는다. 그마저도 하루 아프기라도 하면 그 하루를 견딜 길이 요원해져서 그 애의 등은 항상 굽어 있었고 나는 손목이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다. 하루종일 일을 하고 곰팡이 냄새가 나는 옥탑방에서 너와 숨을 죽이며 하루를 버텼다. 그런 날이 쌓여 내 몸에는 우울의 냄새가 배는데 그 애는 그게 싫었던 건지 매서워져만 갔다. 그래서 나는 네가 화차처럼 달려들어도, 내 몸에 상처가 붙어도 그저 속상했다. 네가 나 말고 더 좋은 사람을 좋아했더라면….
그렇게 하나 둘 포기하고 줄기만으로 살아있게 된 부평초처럼, 죽지 못해 간신히 숨만 붙어 연명한다. 내가 반쯤 죽어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저 부품처럼 일을 하고, 또 다른 곳에서 기계처럼 노래를 하고….
내가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형형하게 빛나는 눈이 있었다. 보석처럼 참 예쁜 눈이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나를 해방시킬 재난의 시작일 줄은 나는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