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집에 원두를 새로 들였어. 네가 보낸 문자가 오랜만에 기억나서. 그라인더가 돌아갈 때면 당신이 떠올라. 네가 돌아오는 그날에 집 안에 커피 향이 있었으면 해.
2.
우리는 반드시 만나야 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어떻게든, 네가 어디 있든 너를 찾아냈을 거야. 어쩌면 운명보다 더 강한 힘으로.
3.
알아챘을지 모르겠지만, 아니 알아채고도 남을 시간이 지나서야 말하네. 당신의 첫 무대, 첫 연극, 첫 대본…… 내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어. 성공적인 공연이었잖아. 그럴 수밖에. 당신을 가장 잘 아는 건 나니까.
4.
사랑하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물었지. 그땐 대답을 망설였어. 내 도덕성에 대한 죄책감 따위 때문에 답을 늦춘 건 아니야. 무엇을 말해도 당신은 받아들일 리 없었고, 나 또한 이해시킬 마음 없어.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야.
사랑하니까 이럴 수 있는 거야.
5.
식사를 할 때 당신을 떠올려. 육류를 씹을 때 특히. 희롱에 가까운 언어라 폄하하거나 매도해도 상관없어. 어쨌거나 나는 당신이 내가 음식을 삼키는 매 순간 당신을 생각한다는 걸 알게 되고, 그로 인해 속을 게워낸다면 기쁠 테니까.
6.
아이가 잠결에 당신 이름을 부르는 걸 용서할 수 없다면, 그렇게 쓴다면 돌아오겠어?
7.
나는 지칠 사람이 아니지. 당신도 그걸 알고 있어. 그게 한때 나를 사랑했던 이유인 것도. 나는 늘 그 자리에 있을 거야. 당신이 원하지 않아도.
8.
아무리 당신과 눈매가 닮았다 해도 그 애에게 애정을 붙이는 건 어려운 일이야. 내겐 다소 인형처럼 느껴지거든. 마네킹, 어쩌면 당신의 눈만 떼어다 오려 붙인…… 당신을 잡아먹고 태어난…… 그런 것을 사랑하라니.
9.
집에 오지 않아도 괜찮아. 당신의 숨이 붙어있는 한 나는 늘 당신의 그림자야. 당신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영원히 당신을 기다리겠지. 사랑을 한다는 말은 기다린다는 말과 같거든.
10.
부패하고 있었다. 말라죽는 것과 달리 손끝부터 썩어 들어가는 기분으로. 여름은 불쾌하다. 그러나 부채질하며 침묵으로 짜증 내는 사람들과 달리, 그는, 온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온통 검은색으로 채워진 그는 사람 같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지나갈 때마다 곁눈질로 옷 끝자락을 훔쳐보다가, 자신들의 행동반경에서 지나가는 순간 없는 사람처럼 제 갈길을 찾았다. 엄마 손 잡아! 얼른 튀어 와! 얼른 앞으로 가요. 길 막지 말고. 아직 사死를 모르는 아이들이 긴 기다림에 칭얼대는 소음도, 그 글자가 의미하는 바를 아는 어른들 특유의 물기 묻은 기도와 호통도 그가 지나가는 순간 침묵으로 길을 텄다. 그 침묵이 당연한 행위라도 되는 것처럼 이상한 낌새 없이 그는 큰 보폭으로 빠르게 지나갈 뿐이다.
여자의 유골함은 제일 끝 쪽에 있었다. 납골당의 제일 안 쪽은 햇빛이 미미하게 스며드는 창가였다. 그는 해를 등지고 섰다.
서지예.
남자, 차제하의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걸려있지 않았다. 그에게는 묵도 또한 없었다. 유골함 뒤쪽, 밝게 웃는 사진이 놓여있었다. 그녀가 처음 찍었던 영화의, 사람들은 기억에서 잊었을 아주 사소한 장면이었다. 0.1초도 안되어 지나갔을 컷이었다. 때문에…… 그는 이 사진을 누가 두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도둑의 존재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은 평소와 같이 편지를 부칠뿐이다. 그에게는 이 과정이 일종의 기도였다. 납골당 구석구석에서 들려오는 비통함과 한 서린 울음, 흐느낌을 무시하고 이 공간에 자신과 서지예만 존재하는 것처럼, 천천히, 부드러운 손길로 편지를 두었다.
이게 마지막이야.
남자의 표정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노을이 지고 있었기에 완전한 역광으로 선 그는 그림자 그 자체로 보였다. 납골당에 울리는 흔한 슬픔도 없는 목소리로, 부정확한 음 없이 정확하게 말하고 있었다. 넘치는 슬픔 속에서 오로지 그 남자만 비틀거리지 않았다. 휩쓸리지 않았다.
다음번엔 직접 전할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자는 발걸음을 돌렸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흔들림 없는 큰 보폭으로……